행당동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많은 이들이 서울의 한 조용한 주거지를 떠올리지만, 저는 문득 조선의 마지막 항전이라 불리는 '행주대첩'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의 뿌리를 따라가다 보면 동네의 역사에 전쟁과 민중의 기억이 스며 있다는 사실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서울 성동구에 자리한 행당동이라는 지명에 어떤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또 그 이름이 어떻게 한 지역의 역사로 이어져 왔는지를 천천히 짚어보려 합니다.
1.이름 속에 감춰진 전쟁의 기억
행당동이라는 지명의 뿌리를 살펴보다 보면 조선시대 임진왜란이라는 격변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임진왜란 중 가장 극적인 승리 중 하나로 꼽히는 ‘행주대첩’은 다들 한 번쯤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과 함께 명장 권율 장군이 이끄는 의병과 백성들이 일본군을 막아낸 전투였는데, 이때 사용되었던 진지가 바로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행주산성 근처였습니다. 그런데 그 전장의 이름인 ‘행주’라는 단어가 어쩌다 서울 성동구의 작은 마을인 ‘행당’이라는 이름과 연결되었을까요?
행당이라는 지명은 본래 ‘행주당(幸州堂)’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조선시대 이 지역에는 행주산성에서 퇴각해 온 의병들과 병사들이 머물렀던 당우(堂宇)가 있었는데, 이곳을 ‘행주당’이라 불렀다는 것이죠. 이는 단순히 지명을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전쟁의 기억이 서울 동부로 이어지며 생겨난 명칭입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행주당’은 점차 줄어들어 ‘행당’으로 불리게 되었고, 마을 이름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행당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음의 축약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지역적 감정이 함께 축적된 결과물입니다. 저는 이 지명의 흐름을 보-며 지명이란 결국 그곳에 머무른 사람들의 경험이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굳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빌딩과 아파트가 즐비한 도시의 한 블록이지만, 이름 안에는 칼과 불, 피와 결의가 남아 있었던 시절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입니다.
2.성곽 도시 외곽에서 자라난 마을
행당동은 서울의 중심이라기보다는 전통적으로 성곽 도시 한양의 외곽에 자리한 지역이었습니다. 조선시대 당시에는 성곽을 중심으로 한 도시 구조에서 바깥으로 벗어난 이 일대는 왕래가 많지 않은 주변부였고, 대부분의 공간이 농지나 산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서울 동부 일대는 낙산과 응봉산 자락 아래 골짜기와 들판이 펼쳐졌던 평온한 장소였고, 그런 곳에 조용히 사람들의 마을이 들어서면서 ‘행당동’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행당동 일대는 응봉산과 금호산 사이로 흐르던 자연 계곡과 연못들이 어우러졌던 지형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자 경작지로 활용되었습니다. 조선시대 후기로 들어서며 이 일대는 점차 마을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근대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주거지로 전환되며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저는 이 과정을 살펴보면서 하나의 이름이 지형과 맞물려 자리잡고 변화하는 흐름이 참으로 흥미롭다고 느꼈습니다.
행당동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행정구역상 여러 차례 변경을 겪었지만, 그 이름은 줄곧 유지되어 왔습니다. 이는 단순히 지명이 익숙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름에 담긴 기억과 상징이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서 의미를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은 도로와 철도, 대형 쇼핑몰과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도시 속 마을이 되었지만, 그 근간에는 여전히 ‘행주당’의 숨결이 살아 있고, 그 안에는 전쟁의 기억과 더불어 이곳을 지켜낸 이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3.전통과 현재가 공존하는 골목들
행당동을 걸을 때면 저는 늘 두 겹의 시간이 겹쳐 있는 듯한 풍경을 마주하곤 합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래된 연립주택과 신축 오피스텔이 나란히 서 있고 골목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아직도 낮은 담벼락과 낡은 기와가 남아 있는 집들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겐 철거 예정지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저에게는 이 풍경들이 바로 이 동네가 걸어온 시간의 증거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장면은 서울 다른 지역에서도 쉽게 볼 수 있지만 행당동에서는 유독 과거와 현재의 접점이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철도와 지하철이 지나가는 교통 요지라는 지리적 특징이 있습니다. 왕십리역에서 응봉산을 넘어가는 방향으로 펼쳐지는 행당동 일대는 서울에서 보기 드문 언덕 마을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형은 개발에 제약을 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기존의 마을 구조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지금도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예전에 살던 사람들이 벽에 새겨 놓은 문패나 오래된 우편함을 그대로 쓰고 있는 집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공간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오래된 흔적들에서 동네의 역사와 삶의 무게를 읽곤 합니다.
또한 응봉산 자락에 자리한 이 동네는 서울숲이나 한강처럼 대형 공원은 없지만 산책로와 작은 쉼터들이 곳곳에 조성되어 있어 삶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부모들,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주민들, 작은 평상을 내놓고 장사 준비를 하는 상인들의 모습이 이 골목들에서 하루하루 이어지고 있습니다. 낡았지만 변하지 않은 동네의 리듬 속에서 행당동은 여전히 그 이름처럼 '행주당'의 시간을 이어가는 듯 보입니다.
한편 행당동은 근래 들어 문화와 예술을 통한 지역 재생의 가능성도 조금씩 모색되고 있습니다. 오래된 집을 리모델링한 북카페나 공방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고 지역 청년들이 주도하는 주민 연계 프로젝트도 시도되고 있습니다. 아직은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지만 저는 이런 변화가 행당동의 이름을 단단히 붙들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이야기를 더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전통은 언제나 고정된 형상이 아니라 현재와 연결될 때 더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되며 행당동이라는 이름도 그런 방식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4.지명이 품은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행당동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단지 발음이 부드럽고 친숙하게 느껴졌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 깃든 ‘행주당’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고 나서부터는 동네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전쟁의 상흔을 품은 장소였고, 민초들의 기억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이 마음 깊이 와닿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시간이 흘러도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이름 안에 담긴 이야기는 더 단단해지고 더 많은 사람들의 해석과 기억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행당동을 다시 걸어보면 그곳은 더 이상 아무 이름 없는 동네가 아닙니다. 조선의 후방 전선이었고, 위기 속에서도 삶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땀이 배어 있는 자리였습니다. 행당이라는 이름이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는 건 이 도시가 겪은 시간들을 존중하고 기억하려는 마음이 지금도 작게나마 살아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동네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우리는 사실 모르게 그 이름에 깃든 시간과 사람을 함께 부르고 있는 셈입니다.
저는 요즘도 서울을 다니다가 행당동이라는 지명을 보게 되면 문득 그 안에 담긴 옛 기억들을 떠올리곤 합니다. 높은 아파트와 복잡한 교차로 사이에서도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이름은 묘하게 따뜻하고 고요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지명이 가진 가장 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쉽게 바뀌지 않고, 누군가 기억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이야기로 전해지는 것. 그 안에 도시의 진짜 역사가 있고, 우리는 그 조각을 이어붙이며 서울이라는 이름의 본모습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