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서구의 대표적인 주거지로 자리잡은 화곡동은 지금은 아파트 단지와 골목상권이 밀집된 생활권이지만,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느껴지는 인상은 조금 다릅니다. ‘화곡’이라는 단어에는 어딘가 풍경이 아름다웠을 것 같은 느낌이 배어 있고, 실제로 그 이름의 뿌리는 궁궐과 연관된 특별한 기록에서 비롯됐습니다. 우리는 매일 주소를 통해 어떤 공간을 구분하고 살아가지만 정작 그 이름이 가진 의미나 유래를 되묻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화곡동이라는 이름도 그렇게 일상 속에서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이름이지만, 그 안에는 조선시대의 궁궐 문화와 꽃을 그리고 돌보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화곡동이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따라가며, 도시의 겉모습이 바뀌어도 이름이 간직하는 기억은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1.화곡동 이름 속에 피어난 궁중의 그림자
화곡동이라는 이름은 한자어 ‘꽃 화(花)’와 ‘계곡 곡(谷)’에서 유래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꽃이 피는 골짜기’ 혹은 ‘꽃이 흐드러진 계곡’이라는 뜻이 되는데 단지 아름다운 풍경을 표현한 이름만은 아니었습니다. 이곳은 실제로 조선시대에 궁궐의 정원을 꾸미고 궁중 그림을 그리는 일을 맡았던 화원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전해집니다. 화원은 단순한 그림쟁이가 아니라 왕의 초상화를 비롯해 어좌 병풍, 궁궐의 벽화와 사방에 놓인 채색화 등을 제작하는 중요한 예술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도화서라는 기관에 소속되어 활동했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면 궁궐을 떠나 자신들의 삶터를 찾아야 했고 그 일부가 정착한 곳이 바로 지금의 화곡동이었습니다.
이 지역이 정착지로 선택된 이유는 지리적으로 한강 남쪽의 비교적 평탄한 지형이었고 동쪽으로는 방화나 개화 일대의 넓은 들판이 이어져 있어 작업과 거주가 모두 용이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도 이 일대에는 꽃을 재배하거나 그림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식물을 기르는 소규모 밭이 많았고 지금의 개화동이나 화곡동 일대에는 화원 출신의 후손이 살았다는 구술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이름의 기원이 문헌에 명확히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볼 때 이 지역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만으로 이름을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화원들이 잠시나마 머물며 자신들의 예술적 감각을 자연 속에 녹여내던 삶의 흔적이 바로 이 이름 안에 녹아 있는 것입니다.
2.꽃 피던 마을이 마을을 만들다
조선 후기까지도 화곡 일대는 한적한 들판과 낮은 구릉이 섞인 평야지대였습니다. 서울 도심에서 거리가 있었던 만큼 궁궐 주변의 소란이나 정치적 중심부의 변화와는 다소 동떨어진 지역이었고, 이 때문에 은둔하거나 조용한 생활을 바라는 이들이 선호하던 마을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림을 그리던 사람들, 꽃을 기르던 이들이 머물던 마을이라는 인식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이곳은 ‘화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과거 이 일대는 ‘화곡리’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해방 이후 행정구역이 개편되며 지금의 화곡동이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됐습니다.
‘꽃이 피는 골짜기’라는 이름은 단지 시적인 표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 이곳에 흐르던 자연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은 지명이었습니다. 동네를 둘러싼 작은 개울과 구릉지는 계절마다 다양한 야생화가 피었고 주민들은 이곳을 따라 논과 밭을 일궈가며 살아갔습니다. 지금은 도로와 건물로 그 모습을 완전히 바꾸었지만, 오래된 사진이나 구술 기록을 통해 전해지는 과거의 화곡동은 이름만큼이나 고요하고 섬세한 풍경을 지닌 마을이었습니다. 주민들이 정성껏 가꾼 꽃밭과 기와집 사이를 흐르던 시냇물은 이 마을이 도시로 변모하기 전까지 존재했던 실재의 풍경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기억이 지금도 ‘화곡’이라는 이름 속에 남아 있습니다.
3.도시로 바뀌며 사라진 기억
지금의 화곡동은 서울 지하철 5호선과 9호선을 중심으로 교통이 연결되는 주거 밀집 지역입니다. 대단위 아파트 단지와 빼곡한 상가 건물이 들어서면서 화원과 꽃밭의 기억은 점점 흐릿해졌고, ‘화곡’이라는 이름이 왜 붙었는지 의문조차 품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1980년대 이후 주택 개발 붐이 불면서 화곡동 일대는 순식간에 택지지구로 바뀌었고 당시 서울 외곽이었던 이 지역은 인구 유입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강서구의 핵심 생활권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개발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들판은 사라지고 논밭은 포장도로로 바뀌었으며 과거의 흔적은 낡은 지명 속 몇 글자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조차 '예전엔 꽃밭이 많았다'는 정도의 막연한 기억만을 남겼을 뿐이고 이제는 그 기억마저도 점점 사라져가는 중입니다.
사실 화원들이 거주했던 역사적 사실은 행정기록이나 문헌보다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 속에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과거를 기록하는 공식적인 자료들은 대부분 궁궐 중심의 역사만을 남기고 그 주변에서 살아간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쉽게 사라지곤 했습니다. 화곡동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들의 활동은 왕의 초상화를 남긴 기록에 등장하지만 그들이 어떤 마을에 살았고 어떤 자연 속에서 예술을 다듬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습니다. 하지만 전해지는 이야기 속에서 이 지역이 그들의 거처였다는 것은 동네 사람들 사이에 오랫동안 공감대로 남아 있었고 그것이 결국 ‘화곡’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지금은 화곡본동과 화곡1동부터 8동까지로 나뉘어 있는 행정동의 체계 안에서 화곡이라는 이름은 오히려 주소나 동사무소 간판에서만 실체를 유지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러나 조금만 시선을 돌려 오래된 골목과 지붕 낮은 집들 사이를 걸어보면 아직도 이 동네가 자연과 함께 있었던 시절의 흔적을 느낄 수 있습니다. 꽃을 키우던 사람들의 손길이 닿았던 마을이 거대한 도심의 일부가 되면서 바뀐 것과 남겨진 것, 그리고 시간이 지운 것을 함께 돌아보는 일이 화곡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도시의 모양은 바뀌었지만 이름은 여전히 그 과거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4.지명이 남긴 의미와 현재의 연결점
화곡동이라는 이름은 이제 행정 지명 이상의 기능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매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출퇴근하며 지하철 역 이름으로만 이 단어를 접하고, 주소를 쓸 때에도 아무 의미 없이 기입하는 단어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상적인 말들 속에 담긴 시간의 깊이를 생각해보면 도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화원들이 머물렀던 마을이라는 유래가 모두에게 기억되지 않더라도 그 흔적이 지명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무척 소중한 일입니다. 한 지역의 정체성은 단순히 행정적인 변화나 도시계획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머물렀고 무엇을 남겼으며 어떤 풍경을 공유했는지가 쌓이고 축적되며 마침내 이름 하나로 압축됩니다. 화곡이라는 두 글자 안에는 꽃을 그리던 사람들의 손길과 자연과 함께하던 삶의 태도가 은연중에 스며 있습니다.
오늘날의 화곡동은 더 이상 들꽃이 피는 골짜기가 아니고 궁궐에서 물러난 화원들이 모여 살던 마을도 아닙니다. 아스팔트가 덮이고 고층 건물이 줄지어 들어선 이곳은 빠르게 살아가는 도시인의 일상에 철저히 맞춰진 공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름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이 도시가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완전히 지우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화곡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시간과 마주하게 됩니다. 어쩌면 지명이라는 것은 그렇게 현재와 과거를 느슨하게 잇는 다리 같은 역할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걷는 골목, 지나치는 간판, 그리고 내비게이션에 뜨는 목적지 안에는 항상 그 땅을 밟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화곡동도 마찬가지로 화원이 떠난 자리, 꽃이 지고 난 골짜기, 그 위에 다시 세워진 도시가 지금 우리가 사는 서울의 일부가 되었고, 그 기억을 이름으로 간직한 채 오늘도 조용히 숨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