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라는 이름을 들으면 오늘날에는 복잡한 교통의 중심지나 서울 동부의 대표 상권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수도권 전철이 엉켜 있는 거대한 역사와 청과물 시장 그리고 각종 병원이 몰려 있는 도심 속 풍경이 곧 청량리의 이미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이 이름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를 품고 있습니다. 도로 위를 오가는 자동차나 전철보다도 더 오래전 이곳은 말을 갈아타고 짐을 나르던 사람들이 모이던 고려시대의 역참지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청량리’라는 지명에 담긴 고려 시대의 흔적과 그 의미를 천천히 살펴보며 과거의 시간들이 오늘의 공간 속에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함께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1.청량리라는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
청량리라는 이름은 매우 청아하고 시원한 느낌을 줍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이름을 자연 경관이나 맑은 물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 지명이 처음으로 역사적 문헌에 등장한 것은 고려 후기부터이며 그 맥락은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풍경과는 조금 다릅니다. ‘청량’이라는 이름은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맑을 청, 시원할 량을 쓰지만 당시에는 이보다 더 실질적인 기능에서 그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바로 이곳이 역참의 기능을 하던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려 시대의 역참은 오늘날의 고속도로 휴게소와 비슷한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방과 중앙을 잇는 통로에 일정 간격으로 역이라는 시설을 설치하여 말을 교체하고 숙식을 해결하며 문서를 전달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청량리는 당시 개경과 남경 사이를 잇는 교통로의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고 그래서 이곳에는 말을 보관하고 사람들을 묵게 하는 건물들이 자리했습니다. 오늘날에는 흔적조차 보기 어렵지만 한양이 조선의 도읍이 된 이후에도 이 지역은 여전히 역로의 중심으로 기능했습니다.
이처럼 청량리의 어원은 단순히 시원하고 청명한 풍경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시 사람들의 이동과 행정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실질적인 기반이었고 그래서 이 이름은 고려 말부터 조선 시대 초까지 문헌에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청량’이라는 이름이 붙은 장소는 전국적으로 많지만 서울의 청량리는 특히 한양 외곽의 핵심 관문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곳이었습니다.
2.청량리의 역사 속 풍경과 사람들
역참이 있던 시절의 청량리는 오늘날처럼 빌딩과 시장이 늘어선 복잡한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곳은 서울의 동쪽 외곽에 위치한 시골 마을이자 들판이 펼쳐진 교외였습니다. 주변에는 낮은 야산과 하천이 있었고 봄이면 복사꽃이 피고 가을이면 들판에 벼가 익어가던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타고 이곳에 도착하면 먼저 역원에게 도착 사실을 알리고 말의 교체를 요청하거나 하루를 쉬어가기 위한 숙소를 찾았을 것입니다. 청량리에는 그러한 사람들을 맞이하는 숙소와 창고가 있었고 간혹 왕의 행차가 지나가는 길목으로도 사용되었던 만큼 관청의 감독도 이루어졌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이 역참의 기능이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정비되면서 청량리는 강원도나 함경도로 가는 길목이 되었고 군사적 요충지로도 간주되었습니다. 병조나 형조 등 중앙 관청의 문서와 명령이 이곳을 거쳐 각지로 전달되었고 반대로 지방의 보고서와 세곡도 이 길을 따라 한양으로 들어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청량리역에서 KTX를 타고 강릉이나 원주로 향하는 모습은 사실 수백 년 전에도 이곳에서 이어졌던 교통과 물류의 흐름을 현대적으로 재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청량리는 단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지역이 아니라 실제로 시대마다 사람들의 움직임과 생활의 맥이 이어졌던 장소였습니다. 시장이 들어서고 교통의 중심지가 된 것도 바로 이 지역의 본래 기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 어디론가 떠나고 돌아오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청량리는 여전히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 ‘이동의 중간 지점’이자 ‘출발의 장소’로 그 역할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3.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는 공간
청량리는 과거 역참이 있던 자리에서 점차 도심으로 확장되며 전통과 현대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철도가 개설되면서 청량리 일대는 서울 동부의 대표적인 교통 중심지로 변화했습니다. 1930년대에 경춘선과 중앙선이 개통되며 이 지역은 다시금 사람과 물자의 집결지로 기능했고 이후 1970년대 이후 수도권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청량리는 교외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출발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겪으면서도 청량리는 여전히 옛 정취를 간직한 채 살아 있습니다. 청량리 시장 골목 안쪽에는 지금도 오래된 한옥이 남아 있고 그 주변에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지어진 낡은 연립주택이 촘촘히 이어져 있습니다.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유난히 낮은 처마 아래로 빨래가 널려 있고 담벼락에는 손으로 쓴 안내문들이 붙어 있어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곳에는 수십 년 전부터 자리를 지켜온 점포들이 여전히 영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세월의 흔적이 담긴 간판과 골목의 구조는 도시의 급변 속에서도 과거의 기운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러한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오래된 기억을 품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는 고층 아파트와 대형 병원에서 현재를 살고 있고 중장년 세대는 골목과 시장에서 과거의 흐름을 지키고 있습니다. 청량리는 단순한 주거 지역이나 상업 지구가 아니라 서울의 동쪽에서 긴 시간 동안 쌓아온 역사와 사람들의 삶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장소입니다.
4.청량리라는 이름이 지닌 지속성
오늘날 많은 도시 이름은 개발에 따라 변경되거나 의미가 흐려지는 경우가 많지만 청량리는 여전히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동대문구에 속하며, 철도역과 시장 그리고 병원 밀집 지역으로 기능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이곳을 ‘청량리’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 이름에는 예전 역참이 있었던 자취와 풍경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이름의 유지라기보다 그 이름이 가진 의미가 시대를 넘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청량리는 또 한 번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청량리역이 복합환승센터로 거듭나며 광역철도망이 연결되고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과거의 풍경은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청량리라는 지명은 서울 동쪽의 대표 지명으로 살아남고 있습니다. 이 일대의 재개발은 단순한 도시 확장이 아니라 오래된 기억과 새로운 기능이 맞물리는 전환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청량리라는 이름은 단순한 행정 단위를 넘어 역사를 간직한 살아 있는 공간의 이름입니다. 고려 시대의 역참에서 시작해 조선의 교통 요충지를 거쳐 현대 서울의 교통과 상권의 중심지가 되기까지 이 지역은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청량리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오가는 장소로서 도시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 이름은 앞으로도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 안에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중요한 상징으로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