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현동이라는 이름은 지하철역 이름이나 남대문 시장 근처 거리 간판에서 종종 눈에 띄지만 그 의미나 유래를 생각해본 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특히 ‘회현’이라는 두 글자는 고유명사 같으면서도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이름에는 조선 시대를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던 도시의 경제 중심지라는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회현동이라는 이름에 담긴 지리적 특성과 역사, 그리고 개성 상인의 흔적을 통해 서울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구성되어 왔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한양 도성 아래에 자리한 회현동 이름의 기원
조선시대 한강은 오늘날의 도로와 철도에 해당하는 가장 중요한 교통망이었습니다. 육로가 발달하기 전까지 사람과 물자는 대부분 강을 따라 이동했고, 나루터는 한양과 지방을 연결하는 길목이자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가양동이 자리한 한강 서쪽 강변은 이러한 나루터의 기능을 가진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강폭이 넓으면서도 수심이 깊지 않아 나룻배가 오가기 쉬웠고, 강화도와 서해로 향하는 배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점이었습니다. 당시 나루터는 단순히 배가 정박하는 장소가 아니라 작은 시장과 숙소, 선박을 수리하는 시설이 함께 있는 복합 공간이었습니다. 먼 길을 떠나는 상인과 지방에서 물자를 싣고 올라온 사람들은 이곳에서 하루 이틀 머물며 다음 여정을 준비했고, 이런 왕래가 반복되면서 자연스럽게 작은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나루터를 중심으로 선주와 뱃사공, 짐꾼, 상인, 장돌뱅이, 그리고 농사를 지으며 생활을 이어가는 토박이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강변에는 잠시 머무는 사람들을 위한 주막과 여인숙이 생겼고, 시장이 서면서 인근 지역에서 잡아온 물고기와 강에서 건져 올린 모래, 주변 들판에서 수확한 곡식이 거래되었습니다. 가양동의 초기 모습은 물류와 상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강변 교역지의 전형이었습니다.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사람들은 나루터에서 물건을 내리고 짐을 실어 나르며 한양 도성으로 향했고, 지방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도 이곳을 거쳐 물자를 실어 보냈습니다. 이런 교역 활동이 반복되면서 마을은 단순한 나루터를 넘어 한양의 서쪽을 대표하는 물류 거점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강변을 따라 펼쳐진 넓은 들판은 농사를 짓기에 매우 적합했습니다. 나루터 주변에는 작은 논과 밭이 만들어졌고, 강에서 공급되는 물을 이용해 벼농사와 채소 재배가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이곳에서 재배된 농산물은 배에 실려 한양으로 운반되거나 시장에서 직접 거래되며 마을 경제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농사와 수운이 동시에 발달한 이 지역은 사람들에게 안정적인 삶의 터전을 제공했고, 머물던 사람들이 점차 정착하면서 촌락이 형성되었습니다. 이처럼 가양동은 한강이라는 거대한 물길과 함께 태어난 마을이었습니다. 한강이 사람과 물자를 모으고 흘려보내는 중심축 역할을 하면서 나루터를 중심으로 교역, 농업, 생활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었고, 이는 마을이 성장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아파트와 상업시설로 가득한 도시 공간이 되었지만, 가양동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던 시절에는 강변을 따라 펼쳐진 들판과 나룻배가 오가던 풍경이 마을의 일상 그 자체였습니다.
2.개성 상인의 발자취가 남은 거리
회현동이 지닌 가장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개성 상인과의 깊은 연관입니다. 개성 상인은 고려 말부터 조선 시대, 근대기까지 이어진 대표적인 상업 집단으로 상품의 유통뿐 아니라 금융 활동까지 주도하며 조선 경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들은 조직적인 상거래 활동을 통해 자산을 축적했고 전국 각지에 지점을 두고 활동했습니다. 특히 서울의 경우 회현동 일대에 정착하여 상권을 형성하며 번영을 누렸습니다.
개성 출신 상인들이 회현동에 모여 살게 된 배경에는 지리적 이점이 컸습니다. 남대문과 연결된 교통의 요지였고 상업지구인 칠패 시장과도 가까워 장사를 위한 입지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단순히 장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도우며 함께 자산을 불리는 방식으로 공동체적 성격을 띠었습니다. 이로 인해 회현동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상업과 금융이 결합된 복합적 도시 공간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지금도 회현동 일대에는 당시 상인의 흔적을 간직한 오래된 한옥과 골목길이 일부 남아 있고, ‘개성상회’와 같은 이름이 붙은 오래된 간판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기도 합니다. 이는 단순히 한 시기의 경제 활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가 어떻게 사람과 자본을 조직화해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문화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시장과 골목, 풍경으로 남은 상업의 기억
회현동의 좁은 골목과 언덕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남대문 시장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흐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회현동이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활발한 상업 활동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물리적 단서이기도 합니다. 남대문 시장은 현재 서울 최대 규모의 재래시장 중 하나이지만 그 뿌리는 조선 시대 회현동 인근에 자생적으로 형성된 상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당시 이 일대에는 의류와 직물, 잡화, 식료품 등을 거래하는 상점이 밀집해 있었고, 그 상인들 중 많은 이들이 개성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회현동의 상업적 성격은 분명했습니다.
특히 개성 상인들이 만든 상회 조직은 물자 유통뿐 아니라 금융 거래까지 가능하게 했고 이러한 경제적 활동은 지역 주민의 삶에 직결되는 방식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골목 어귀에 자리 잡은 전당포, 필통과 연필을 팔던 문구점, 기름 종이를 깔아놓고 앉아 있던 좌판 상인들은 단지 생계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상업 생태계를 이루는 구성원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고층 빌딩과 프랜차이즈 매장이 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뿌리를 더듬어 보면 개성 상인의 조직력과 회현동이라는 입지의 특성이 만난 결과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4.회현동 이름 속에 녹아든 서울 도심의 전통
회현동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행정지명이 아니라 서울 도심이 어떻게 형성되고 확장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실마리입니다. 조선 시대 남대문 밖 공간이었던 이곳은 개방성과 교통의 요지라는 장점을 바탕으로 상업 중심지로 발전했고, 근대 이후에는 철도역과 전차 노선이 들어서며 교통의 요충지로서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됩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역에서 출발한 철도가 남대문을 지나 남산 기슭을 따라 이어지면서 회현동 일대가 근대화의 전초기지로 기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회현동은 한결같이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모일 회, 밝을 현’이라는 이름은 단지 과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이 지역이 지닌 정체성을 말해주는 문장처럼 느껴집니다. 남대문 시장을 중심으로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소리, 다닥다닥 붙은 상가 건물, 그리고 길을 비켜서 오르내리는 골목은 회현동이라는 공간이 여전히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서울의 수많은 동네 이름 중에서 회현동은 특히 경제와 상업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도시의 시간과 이야기를 응축한 공간입니다. 지명은 결코 우연히 붙지 않습니다. 회현이라는 이름은 사람과 물자, 그리고 시대가 서로 교차하던 지점에서 탄생한 이름이며 지금도 그 흔적은 지도의 한 구석과 시장통의 활기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