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라는 도시는 그 이름만으로도 무게를 지니고 있지만 정작 그 도시가 어떻게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 서울의 동네들을 걸으며 이름에 남은 단서들을 따라가다 보면 도시가 확장되어 온 방식을 조금씩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서울 한양의 확장사를 동네 이름을 통해 짚어보려 합니다.
1.성곽 안에서 출발한 이름의 뿌리
한양은 처음부터 거대한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조선 태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은 1394년 이후 도시는 네 개의 산을 끼고 자연스럽게 둘러싸인 공간 안에서 출발했습니다. 북악산 낙산 인왕산 남산을 따라 성곽을 쌓았고 그 안쪽을 중심으로 궁궐과 관청 시장이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그 구역 안에 모인 이름들은 대부분 관청과 관련된 명칭을 따라 생겨났습니다. 예를 들면 관훈동은 관원들의 자제를 가르치던 훈도청이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고 원서동은 도성 안 원자와 서자의 집이 있던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그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렇듯 성안의 이름은 지형과 관청 혹은 왕실과의 관련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붙여졌고 일상적인 생활보다는 제도적인 구조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종로구와 중구를 걸어다니다 보면 낯선 듯 고풍스러운 지명들이 즐비한데 그 속에 당시 서울의 도시 구조와 사회적 질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처음부터 계획된 구조 속에서 출발했고 그 중심은 어디까지나 왕과 국가의 운영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도시가 살아 있다는 것은 늘 경계를 밀어낸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성곽 안의 공간이 행정과 권력 중심지였다면 성곽 밖에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생활 공간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이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름은 단순한 표식이 아니라 사람들이 머물고 살아가며 공간을 구별하려 했던 방식이었고 그렇게 생겨난 이름들이 곧 서울 확장의 시작을 말해주는 단서가 되었습니다.
2.성밖 마을의 탄생과 확장
성곽 밖에 모여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상인 장인 그리고 각지에서 모여든 서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도시의 경계 바깥에서 집을 짓고 삶을 꾸려나갔으며 그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졌습니다. 성밖 마을의 이름은 성안의 엄격한 제도와는 달리 훨씬 더 생활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고 그것은 오히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서울의 정서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예컨대 창신동은 ‘믿음을 베푼다’는 뜻의 이름으로 성밖 봉제촌이 형성되며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이곳은 동대문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 덕분에 봉제업이 발달했고 수많은 사람들의 손으로 도시의 경제가 유지되던 중요한 작업지였습니다. 또 돈암동은 ‘돈화문’과 가까운 언덕에 있었던 곳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궁궐의 부속 공간이 아닌 일반 서민의 주거지로 확장되어 갔다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성밖 마을은 점차 도성 외곽에 띠처럼 둘러져 형성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행정구역으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건 그 이름들이 대부분 지형이나 기능 혹은 마을의 전통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지금의 강북 일대에 있는 정릉길이나 북한산 자락 아래 있는 수유동의 경우에도 주변 자연지형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름들이 남아 있으며 이는 조선시대 한양이 자연환경과 공존하며 확장되어 온 방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단순히 면적이 넓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마을과 삶이 더해지며 덩어리를 키워온 결과였고 이름은 그 확장의 흔적을 가장 정확히 보여주는 방식이었습니다. 도시가 확장되었다는 말은 행정구역이 늘어났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사람들이 새로운 장소에 삶을 심었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을 부르기 위한 이름들이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3.강과 언덕 너머에 생겨난 이름들
서울의 확장은 성곽 너머로 뻗어 나가며 점차 강을 건너고 산을 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도성 바깥은 왕도 질서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고 행정의 범위를 벗어난 땅은 오랫동안 주변부로 취급되었지만 사람들은 그런 공간에 삶을 심으며 스스로 이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강남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강 남쪽은 오랫동안 비옥한 농지와 목장으로 쓰이던 땅이었고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여백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도시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강을 건넌 지역은 삶의 공간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마을이 생기고 도로가 뚫리며 서울이라는 이름 안으로 편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잠실이라는 이름은 누에를 치던 ‘잠실도회’에서 유래했고 그 흔적은 도시 확장의 초기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압구정은 한명회의 정자가 있던 곳에서 그 이름을 물려받았고 한강을 내려다보던 조선의 정취가 지명에 남았습니다. 반면 지금의 목동은 양과 소를 방목하던 넓은 들판이었고 그래서 이름조차 목축의 흔적을 그대로 담았습니다. 서울 한복판에 서 있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과거에는 짐승이 풀을 뜯던 곳이었다는 사실은 도시의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흘렀는지를 실감하게 합니다. 북쪽으로 눈을 돌려 보면 노원이라는 이름도 도시 확장의 한 갈래를 말해줍니다. ‘노’는 벌판을 뜻하고 ‘원’은 들판을 의미하는데 이 지역은 서울에서 의정부로 넘어가는 길목이자 한때 넓은 평야 지대였습니다.
이름은 삶을 기반으로 탄생하고 도시가 커지며 그 이름들은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해왔습니다. 서울은 그렇게 경계를 넓히며 새로운 공간을 품었고 그 흔적은 지명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4.서울이라는 이름에 스며든 수많은 이름들
지금의 서울은 하나의 이름이지만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지명은 각기 다른 시기와 삶의 기억을 품고 있습니다. 이름을 들여다보면 서울이라는 도시가 어느 순간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생활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어떤 이름은 왕실의 권위를 따라 생겨났고 어떤 이름은 농사와 장사와 수공업 같은 사람들의 생업을 배경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들이 점차 도심의 이름으로 자리 잡으면서 서울은 단지 행정구역이나 도시계획이 정한 땅이 아니라 이야기가 겹겹이 쌓인 시간의 지도처럼 되었습니다.
한양도성에서 출발한 도시가 성곽을 넘고 강을 건너고 산을 넘으며 확장되는 과정은 단순한 면적의 증가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 변화하고 이동하는 흐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지도를 펼쳐 서울의 지명을 하나하나 읽다 보면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인물들의 발걸음과 목소리를 상상하게 됩니다. 상도동의 언덕길을 따라 짐을 나르던 사람들, 잠실에서 누에를 기르던 여성들, 창신동 봉제방에서 밤을 새우던 재봉사들, 노원 벌판에서 볕을 맞던 농부들. 그 모두가 지금의 서울이라는 이름에 조용히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서울은 변화를 멈추지 않는 도시입니다. 그러나 변화 속에서도 어떤 것들은 오래도록 남습니다. 동네 이름이 그중 하나입니다. 아무도 깊이 묻지 않지만 매일같이 입에 올리는 이름은 사실상 도시의 본모습을 담은 가장 오래된 단서입니다. 도시가 더 확장되더라도 이름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많은 이름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가운데서도 옛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과 입을 통해 또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동네 이름을 따라 걷는 이 시간이 단순한 산책이 아니라 도시의 시간을 읽는 사색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다음에 누군가 서울 어딘가의 이름을 무심코 말할 때 그 이름에 담긴 시간과 사람을 함께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