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이라는 지명을 떠올릴 때마다 저는 강가에 몸을 웅크린 채 도시를 바라보는 커다란 용의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서울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한강을 끼고 앉은 이 땅은 지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중심이 되는 위치에 자리해 왔습니다. 그런데 왜 ‘산’도 아닌 강가에 ‘용산’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서울의 이름 중에서도 유난히 상징적이고 상상력이 깃든 이 지명의 유래를 따라가 보려 합니다.
1.용이 깃든 땅이라는 말의 배경
용산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멋을 위한 표현이 아니라 이곳의 지형과 그 지형이 만들어낸 상상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저는 이 동네를 처음 제대로 인식하게 된 순간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지하철 1호선 열차가 한강 다리를 지나며 창밖으로 도시의 윤곽이 펼쳐질 때 용산이라는 역명이 내 시선에 포개지던 그 순간은 어딘가 비범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 이전부터 용산은 물과 맞닿은 낮은 언덕이 이어진 지형이었고 그 언덕은 강변에서 서서히 솟아오르다가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더 높아지는 특징을 가졌습니다. 바로 이 부드럽고 유려한 곡선의 지형을 예로부터 ‘용이 누운 형국’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풍수에서는 이렇게 생긴 땅이 용맥 즉 좋은 기운을 지닌 땅이라고 해석되었고 그런 형상의 중심에 자리한 마을은 자연스럽게 ‘용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지역은 예부터 한강 물류의 중심지였고 강과 땅이 만나는 이 경계는 물자를 나르고 정보를 퍼뜨리는 거점으로도 기능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군사 주둔지와 포구가 함께 있었고 나중에는 외국과 통상하는 거점으로 지정되며 한양 외곽에서 국제 교류의 첫 관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땅은 단순히 지리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실제로 물류와 정치 군사 외교의 요충지였고 ‘용이 깃든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닌 실제의 반영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용산이라는 이름은 신화적인 환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형이 가진 특성과 역사적 기능을 포괄하는 상징이었고 바로 그 점에서 저는 이 지명이 다른 동네 이름보다 더 선명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름 하나로 풍수와 전략과 상상력을 동시에 품는 동네는 서울 안에서도 흔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2.물과 땅의 경계에서 만들어진 정체성
용산이라는 지명은 단순히 명당을 뜻하는 말을 넘어서 실제로 서울이라는 도시가 강을 중심으로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보여주는 좌표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한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유난히 용산 구간에서 발길이 오래 머무는 걸 자주 경험합니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육지와 물길이 가장 넓게 만나는 곳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한강은 오랜 시간 서울의 경계이자 심장 같은 역할을 해왔고 용산은 그 심장의 맥박이 가장 강하게 뛰는 자리였습니다. 강을 따라 형성된 자연포구는 자연스럽게 교역의 공간이 되었고 근대에 들어서며 기차역과 부두 병영과 외국인 거주지가 이 일대에 밀집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군대와 미군 기지가 연이어 들어오면서 용산은 서울 속의 또 다른 서울처럼 기능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서울의 공간 구조를 바꿔놓은 기점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지명을 보면 도시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히 풍수지리적 명당이라는 표현에 머물렀다면 용산은 서울에서 그리 특별한 곳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지명은 역사와 공간을 연결하며 실제로 도시를 구성해 온 핵심축이었고 저는 그 사실을 거리를 걸을 때마다 새삼 실감하곤 했습니다. 지금의 서울이 겉으로 보기에는 평평한 듯 보이지만 그 안을 구성하는 지형과 이름은 매우 입체적이라는 사실을 이 동네를 통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용산은 그만큼 서울의 가장 중심에서 강과 땅과 사람이 만나는 상징적인 공간이었고 이 지명이 주는 울림은 도시의 시간을 꿰뚫는 힘을 가졌습니다. 저는 그 이름이 생긴 이유와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이유를 곱씹으며 이곳을 단순한 주거지가 아닌 서울의 본질을 보여주는 마디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3.이름에 새겨진 시대의 흔적
도시의 이름은 언제나 고정된 의미만 갖는 것이 아닙니다. 용산이라는 이름 역시 처음에는 용이 머문 산이라는 전통적인 풍수적 의미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지명은 전혀 다른 층위의 이미지를 입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동네를 지날 때마다 과거의 용산과 지금의 용산이 얼마나 다른 의미를 갖는지 새삼 느끼곤 했습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근대 이후였습니다. 개항과 함께 외국인 조계지가 들어서고 이곳은 외국 군대의 주둔지로 지정되면서 한반도에서 가장 빠르게 외세와 맞닿은 장소가 되었습니다. 조선 말기 일본군이 들어왔고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군사적 기지와 철도 운송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 흐름은 광복 이후에도 이어졌고 미군기지가 자리를 잡으면서 이곳은 오랜 시간 동안 사실상 대한민국 정부의 손이 닿기 어려운 치외법권 공간으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저는 용산이라는 이름이 한편으로는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기억을 함께 안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서울 시민들이 오랫동안 출입하기 어려웠던 미군기지 주변의 분위기, 철책과 경계의 이미지,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 채 주변을 맴돌던 일상의 흔적들까지. 용산이라는 이름은 그저 지형의 명당이라는 낭만적 인상을 넘어서 국가와 도시 사이의 공간이 어떻게 특정 권력에 의해 사용되었는지를 드러내는 단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간 속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곳을 삶의 장소로 삼았습니다. 한강로를 따라 시장이 형성되었고 전자상가와 병원이 들어섰으며 기찻길 아래로는 언제나 사람들이 붐볐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외국 군인과의 접촉 지점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철길을 넘어 이웃을 만나러 가는 동네 골목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이야말로 용산이라는 이름이 가진 가장 복합적인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권위와 현재의 생활이 뒤섞여 있는 공간. 화려함과 상처가 동시에 공존하는 장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용산은 단순히 지명 그 이상이 되었고 많은 서울 사람들에게 어떤 뚜렷한 감정이나 기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름이 시대의 분위기를 담는 그릇이라면 용산이라는 단어는 조선의 기운과 근대의 흔적과 오늘의 일상이 차곡차곡 쌓인 도시 기억의 결정체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이름은 또다시 새로운 의미를 품으며 다음 세대를 위한 공간으로 다시 쓰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4.새로운 용산을 부르는 사람들의 시간
도시는 시간의 층을 따라 쌓여가고 그 위에 이름은 겹겹이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용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 동네를 지날 때마다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풍경과 마주치곤 합니다. 미군기지가 반환된 땅 위로 공원과 박물관이 세워지고 고가도로 아래는 사람의 발길이 닿는 산책길로 바뀌었습니다. 이름은 그대로지만 풍경은 분명 달라졌고 사람들의 시선도 점점 새로워졌습니다.
용산은 지금 재건과 전환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철도와 군사시설로 단절되었던 공간들이 다시 연결되고 있고 이곳을 중심으로 도시의 축이 재편되고 있습니다. 저는 때때로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앞으로의 용산은 어떤 이름으로 기억될까. 예전처럼 풍수 명당의 고장으로 불릴까. 아니면 전자상가와 병원의 거리로 남게 될까. 혹은 공원과 문화시설이 어우러진 생활 중심지로 변화할까.
사실 그 어떤 이름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용산이라는 이름은 과거의 의미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의미를 얼마든지 덧입을 수 있는 유연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유연함이야말로 이 지명이 지닌 가장 깊은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이름을 통해 장소를 기억하고 장소를 통해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떠올리게 됩니다. 용산은 그런 점에서 도시와 사람 사이의 거울처럼 작용하는 이름이었습니다.
이제 용산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특정 권력의 경계선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과 기억이 스며든 삶의 공간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산책하는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는 어른들과 역사를 공부하는 청소년들이 그 이름 아래서 각자의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장면들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용산은 여전히 용이 깃든 곳이지만 그 용은 이제 권위나 전설이 아니라 사람들의 손과 발이 만든 도시의 흐름 속에 조용히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